하나라, 전설상의 왕조 :: 역사의 하루

 

 

하나라, 전설상의 왕조

 

(夏 , 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상나라 이전 수백 년간 존재했다고 기록된 나라이다. 그 연대는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해 기원전 2070년경에서 기원전 1600년까지로 추정한다. 하 당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자료는 없으며, 대체로 중국 사학계에서는 얼리터우 문화를 하왕조의 것으로 비정하고 하나라의 실존을 주장하나 중국 외부에서는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중국 전설상의 왕조이다.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요임금의 말년, 홍수가 일어나 우임금(禹)이 치수 사업에 성공했다. 그 공으로 순임금(舜)이 죽은 후, 제후(諸侯)들이 받들어 왕위에 오르고 하 왕조를 열어 이후 17대에 이어졌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도하려 했으나, 제후들이 우의 아들 (啓)를 추대하여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에 의한 왕조가 출현했다. 17대의 걸왕 때에는 정치가 포악해지고 민심을 잃어 상(商)나라의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하(夏)의 소재지를 산시(山西)·산둥·허난 등으로 추측하는 학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우의 창업

 

하왕조의 시조가 되는 오제의 손자 중 한 명이다. 의 시대에 우는 치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에게 추천 받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았고 공적을 이루어 크게 인정받았다. 순은 덕망이 높았던 우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순이 사망한 후 3년 상을 치른 우는 순의 아들인 상균을 제위에 앉히려고 했지만 제후들이 상균을 순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가 제위에 즉위하였다. 양성을 도성으로 정했다. 우의 성은 사(姒)였지만 왕조 창시 후에 하후(夏后)로 바꾸었다. 우는 즉위 후 잠시동안 무기 생산을 그만두고 궁전의 대증축을 한동안 재고하였으며 관문과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을 면제했다. 또한 지방에 도시를 만들었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이 결과 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조공을 청하러 오게 되었다. 또한 우는 여러 하천을 정비했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육성하였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9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했고 스스로 솔선수범하였다. 죽서기년에 의하면 45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즉위 후 고요(皋陶)가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지만 고요의 사망으로 익(伯益)이 조정을 보좌하였다.

 

최초의 세습왕조

 

우가 사망한 후 익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익이 집정에 익숙하지 않아서 제후들은 우의 아들인 를 제위에 앉혔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위의 세습으로 여겨진다. 제위에 오른 계는 유호씨가 복종하지 않자 이를 토벌하였다.

계가 사망한 후 아들 태강이 제위를 계승했지만 사기에 의하면 '나라를 잃었다'라고 기록되는 등 국세의 쇠퇴를 볼 수 있다. 태강이 사망한 후 남동생 중강이 뒤를 이었다. 중강 때에 제후인 희씨와 화씨가 음락에 빠져 있었으므로 윤(胤)에게 명해 희씨와 화씨를 토벌하였다.

사기에 중강 이후의 왕들의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히 전하고 있지 않다.

 

하나라의 쇠퇴와 멸망

 

하의 14대 왕인 공갑은 성격이 음란하고 귀신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해 인심은 하왕조부터 멀어져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은 인덕이 부족해 무력으로 제후와 민중을 억압해 인심의 배반을 불렀다. 또 상나라의 을 불러내 투옥시켰다. 탕은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제후들이 그의 밑에 모였으며 마침내 걸을 쫓아냈다. 걸은 명조로 도망쳤지만 객사했다. 이 걸에 관한 전설은 상나라의 와 지나치게 비슷해서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주장도 있다. 상나라의 탕왕은 제위에 즉위하면서 하나라의 혈통을 받은 사람들을 하정(夏亭)에 봉했다. 주나라 때에는 기나라의 제후로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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