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고조선의 국조 :: 역사의 하루

 

단군, 고조선의 국조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신화적인 시조이자 고조선의 국조(國祖)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대종교(大倧敎)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생애

 

단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경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조선을 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 《응제시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朗城)을 쌓고 태자 부루(夫婁)를 파견해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塗山會盟)에 참석시켰다고 한다.

 

문헌 기록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으로는 고려 때의 기록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다. 그 이전 기록에는 단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는 단군이란 글자는 없지만 “선인 왕검”이란 글자가 보인다.

단군의 출생과 생애에 대해 《삼국유사》는 환웅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 왕검이라고 기록한다. 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하였다. 그는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기원전 1122년(주 무왕 13년, 기묘년)에 무왕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 《제왕운기》는 약간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1028년 또는 1038년 또는 1048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제왕운기》의 단군은 ‘박달나무 단(檀)’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였을 때의 기록에 세주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왕검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최초이다. 인명이 아닌 경우 위만이 도읍하였던 고조선의 수도에 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선인 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선인 왕검이 왕이 되어 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 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단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 기록은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만이 이러한 기록이 위서가 아닌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다.

 

단군에 대한 인식

 

단군은 고려 말, 대몽항쟁 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하여 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 세종 때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모신 사당을 지어 국가적으로 제사를 올렸으며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사가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각축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구심점으로 대폭 강조되어 단군교(檀君敎)와 같은 종교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부각된 단군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종교 및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단군 시대의 역사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풀린 《대동사강》, 《규원사화》 등의 위서들이 편찬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일제 혹은 친일파들이 단군을 종교적·학문적으로 이용하여 민심을 무마하려 하거나 일선동조론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악용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남한의 단군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 사회에서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중점을 두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남선무당이 ‘단골’로 불리는 것을 주목하여 단군을 제사장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단(檀)을 제터(壇)의 다른 표현이라 하여 단군을 ‘壇君(단군)’으로 표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의 지적에 대해 무녀를 당골네라고 부르는 것은 무녀가 서낭당이 있는 고을에 산다고 하여 ‘당골네’로 부르는 것일 뿐, 단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북한에서는 광복 이후 단군 및 단군신화를 고조선에서 정치권력이 성립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건국신화로 보는 것이 기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4년단군릉을 발굴할 무렵부터 입장을 바꾸어 단군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고 단군이 실존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단군은 한민족이 세운 국가인 고조선의 최초의 왕으로서 출생·건국·무덤이 모두 평양에 있다고 주장한다. 평양직할시 근처에는 북한이 발굴하여 재건한 단군릉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 남한 학계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에 대하여 남한의 역사학계는 주체사상이 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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