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 봉건제도로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다. :: 역사의 하루

 

주나라, 봉건제도로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다.

 

(周,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나라는 상나라를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한 나라이며, 790년간 유지했었다. 이 시기 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주나라는 기원전 11세기 중엽에 서쪽의 웨이허 강 분지에서 세력을 확대하여,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中原)을 지배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주나라 청동기 문화권 영향력은 중원에서 더욱 남쪽 지방인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등 양쯔강 유역까지 미친 게 확실하다.

봉건제도는 이러한 광대한 영역을 유효하게 통치하려는 목적에서 발현되었다. 주 왕조는 농업을 장려하였고, 농지 개척을 진척하였으며, 농기구는 목재나 석재로 만들었다.  기원전 771년 견융이 주나라를 침략하여 유왕을 살해했으므로, 제후들이 평왕을 옹립했고, 곧 이어 호경(鎬京, 현재의 시안 시 부근)에서 부도(副都) 낙읍(洛邑, 현재의 뤄양 시)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기원전 1046년~기원전 771년), 이후를 동주(기원전 770년 ~ 기원전 256년)로 구분한다.

 

봉건제도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무왕은 개국 초부터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등의 개국공신 이들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봉지에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고 주(周) 왕실을 지키게 했다. 시간이 지나 이것이 제후의 영토가 제후국으로서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다시말하자면, 봉건제 하에서 제후국의 왕은 황제로부터 분봉받은 직할지를 다스리고, 분봉지를 동맹 세력이나 일족에게 세습하였다. 황제는 그에 대한 대가로 제후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과 공납을 받았다. 주나라나 제후의 나라는 읍(邑:도시국가)이었고, 그 구조는 씨족적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씨족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은 종법(宗法)에 의하여 규제되어 있었다.  부계 혈통의 종족 구성에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이는 곧 천자의 적장자만이 천자가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데, 황제의 자식들은 대종이고 왕의 자식들은 소종이라 하여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제후·대부·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전국적인 통치 제도에 이용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황실의 정통성을 인정하였고 그러한 틀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투었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권위가 유명무실화 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스스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역사

주나라는 은나라의 서쪽 (지금의 산시 성)에서 은나라와 상당 기간 공존했었다. 주나라는 은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도 때때로 은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주나라 왕실에서 은나라를 정복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전통적으로 두 국가 사이 대대적인 전쟁은 BC 1122년에 주나라가 시작하였다고 사가들은 생각하지만, 결정적인 전쟁은 BC 1111년경에 벌어졌던 것으로 추측한다. 주나라가 모든 은나라 영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기 전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데 3년이나 걸렸지만, 결국 주나라가 중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주는 영역 내 질서를 유지하고 모든 지역에 대한 군주의 지배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각지에 봉건 제후국을 설치했다.

주나라 수도는 본래 지금의 시안 부근 웨이허강(渭河)이 황허강(黃河)과 합류하기 전 지점에 있었다. 나아가 주나라는 동부지역으로 팽창한 제국과 제후국을 지원하기 위해 황허강 중류지역에 있는 뤄양에 동도(東都)를 세웠다. 그러나 약 200년 후 20여 명의 제후들이 지방에서 세력을 점차 키워감에 따라 이러한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BC 8세기에 기본적으로 거대한 가족체제였던 주의 정치체제는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여러 제후들이 주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되면서 유력한 제후들이 번갈아 패자(覇者)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BC 771년 이전의 주를 보통 서주(西周)라고 하며 BC 770년부터는 동주(東周)라고 한다. 동주는 춘추시대(BC 770~403)와 전국시대(BC 403~221)로 나뉜다. 춘추시대때는 많은 작은 제후국들간에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작은 제후국들이 서로에게 병합되어 전국시대에 들어서는 몇몇의 강대한 제후국들이 나머지 작은 제후국들을 병합하며 패권을 둘러싸고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이들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진(秦)이 나머지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통일된 제국(BC 221~206)을 세웠다.

 

정치

 

주의 여러 제도에 대해 주공 단이 엮었다고 여겨지는 『주례』에 주나라의 관제에 대한 매우 상세한 기술이 있지만, 이 서적이 집필된 시대는 전국시대 이후라고 생각되므로 이것만으로 주의 관제에 대해 논하려면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 더불어 금문에 의하면 주에는 경사료(卿事寮)·대사료(大史寮)로 불리는 2개의 조직이 있었다. 경사료의 장관은 태보(太保)·태사(太師)의 2개가 있었으나 나중에는 태사만 남았다. 그 밑으로 사마(군사 담당)·사토(토지 관리 담당)·사공의 관직이 있었고 각 제후 밑에도 같은 관직이 있었다. 대사료의 장관을 태사(太史)라 부르고 역사의 편찬및 각종 의례와 제사 등을 관장하였다. 주나라의 신분제도에 관해서는 춘추좌씨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춘추좌씨전』에 의하면, 왕 아래에 제후가 있고 그 아래에 대부(大夫)로 불리는 일종의 귀족층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 사(士)로 불리는 지식인 층이 있고 그 아래가 서민이었다. 그러나 대부와 사라는 계급은 금문에는 없다. 더불어 재산의 일종이었던 노예 계층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데, 이들은 주로 주인을 대신해하여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맡아 하였다. 더 나아가 노예 계층 안에는 직공이라고 생각되는 부류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청동기의 주조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토지 제도에 대해서 주나라는 정전제를 실행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경제와 사회

 

중화문명은 주나라 시대때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가 끄는 쟁기와 철기 그리고 석궁(石弓)과 기마술이 모두 주나라 시대때 도입되었다. 또한 처음으로 대규모 관개와 수리시설의 설치도 이루어져서 화북 평야의 농업생산량이 크게 향상되었다. 나아가 도량형을 새로 건설되었고 교통체계도 크게 개선되었다. 때문에 상업이 발전되었고 인구와 도시가 늘어났으며, 화폐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덧붙여 젓가락을 사용하는 문명 또한 이때 출현하였으며, 은나라 시대때 원시적인 형태로 시작된 문자는 주대에 들어서면서 보다 체계적인 문법을 갖추게 되었다. 덕분에 철학도 크게 번성하여 제자 오가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후대의 중국인들은 중국 문명의 기원과 발전을 알기 위해서 주나라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다.

 

문화

 

상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그 예술성면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주나라도 기본적으로는 그 기술을 계승하고 있었지만 예술성에서는 간소화되어 은대에 비하면 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시대의 청동기는 거의 모두가 제사를 위한 제기였으며, 따라서 실용적인 청동기는 그 수가 적다. 이러한 청동기는 거푸집을 이용하여 주조되었는데, 거푸집을 제작할때 당대의 여러 정보를 거푸집에 새겼다. 따라서 등대의 청동기에는에는 당대의 역사와 점의 결과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금문이라 불리는 것으로 후대 주나라를 연구하였던 사가들에게 있어서 이는 중요한 기록물이었다. 상대와 비교해서 주대는 문장의 길이가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상나라와 주나라는 여러 차이를 보였는데, 그 차이들 중 하나는 바로 조상에 대한 믿음의 차이였다. 상나라에서는 조상에 대한 숭배와 외경심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제사를 게을리하거나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하거나 조상의 명망에 흠집을 내면은 당장이라도 나와 나의 가족들에게 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시 상나라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반대로 주의 사람들도 조상에 대한 제사는 지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조상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종교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닌 순수하게 경의를 표하는 대상이었다. 더불어 상대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점을 쳤지만 주대에는 그러한 일이 적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상이 남긴 금문의 수에 비하여 주가 남긴 금문의 수는 적어 현대에 이르러는 주대 전기보다 오히려 상대의 자료가 많다. 거푸집을 제작할때 거푸집에 문장을 새겨 넣고 청동을 붓고 거푸집을 깨어 완성된 청동기에 문장이 돋아 보이게 하는 기술과 방식은 왕실이 독점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청동기는 때때로 제후에게 하사되는 경우가 있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설 무렵의 혼란으로 인하여 이러한 기술이 제후에게도 전파되어 제후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건축 분야에 관련하여 주대에 들어서 모즙 기와가 일반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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