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 루스인의 군주 :: 역사의 하루

 

차르, 루스인의 군주

 

차르러시아불가리아정교회 슬라브족(동슬라브족남슬라브족)의 군주 칭호다. 러시아 차르국 및 그 후신인 러시아 제국과 같은 독재군주정을 차르주의라고 한다. "차르"라는 말은 로마 제국부제를 뜻하는 라틴어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황제에 거의 비슷한 의미에 가깝지만, 서양 전통에서 황제란 로마 황제의 후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른 황제(비잔티움 황제신성로마황제) 또는 종교적 절대권위자(교황이나 세계총대주교)의 승인을 받아야 황제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서유럽에서는 동유럽의 "차르"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왕작급, 또는 왕 이상 황제 미만 정도의 작위라고 여겼다. 결국 근대 이후로는 러시아에서 군주 칭호를 라틴어식으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칭하고, 동군연합으로 복속시킨 국가의 왕작으로 "차르"를 사용하면서 차르는 임페라토르보다 격이 낮은 왕급 작위로 굳어진다. 그러니까 치르는 황제와 왕 사이이며, 반면 카이저는 온전히 황제다.

 

러시아의 차르

 

금장 칸국의 지배를 처음으로 거부한 루스인 군주 미하일 야로슬라비치가 "루스인의 바실레우스"를 칭했다. 이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을 처가 쪽으로 계승한다고 주장하며 서방으로 보내는 외교 문서에 "차르"를 칭하기 시작했다. 1480년경부터 이반 3세는 자신을 라틴어로 "임페라토르"라고 했고, 스웨덴에게는 "케위세르(keyser)", 덴마크와 독일기사단, 한자동맹에게는 "케이세르(kejser)"라고 했다. 이반 3세의 아들 바실리 3세도 이런 칭호를 유지했다. 바실리 3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차르"라고 했는데, 지기스문트 폰 헤르베르슈타인은 이것을 각각 라틴어와 독일어로 "임페라토르", "카이저"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정교회의 적통을 이어받은 "제3로마"가 되려 하는 러시아의 야심과 관련된 것이었다. 1514년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모스크바 대공을 황제로 인정해 주었다. 하지만 "전루스인의 차르" 또는 "전러시아의 차르"(ЦР҃Ь ВСЕꙖ РУСИ)라는 작위명으로 정식 대관한 최초의 군주는 이반 4세다. 서방에서는 이반 4세가 스스로를 차르로 대관하고 3년이 지난 1550년 이후로도 모스크바의 군주를 어떤 격으로 대우할 것인지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다. 폰 헤르베르슈타인(1516년, 1525년), 다니엘 프린츠 아 부하우(1576년, 1578년), 유스트 유엘(1709년) 등은 "차르"를 "황제"로 번역해서는 안 되며, 러시아 차르는 루스인들에게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존재이므로 그들 성경의 왕들과 마찬가지로 왕(reges)이라고 하면 족하다고 주장했다. 1489년 이반 3세는 자신의 군주권은 그 누구의 승인도 따로 요구하지 않는다며 교황의 제안을 거부한 바 있다. 한편, 가짜 드미트리 1세의 경호원이었던 용병대장 자크 마르그리트는 모스크바인들에게 "차르"는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이스라엘의 왕들 같은 어떤 지상의 전제통치자가 아니고 신 그 자체이기 때문에 "카이저"나 "왕"보다 더 명예로운 칭호라고 주장했다. 1659년에서 1666년까지 알렉세이 차르의 주치의를 지낸 영국인 의사 새뮤얼 콜린스는 런던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러시아인들은 다윗을 "차르"라고 하고 우리(서방의) 왕들은 "키롤"이라고 하는데, 자신들의 "차르"는 왕보다 더 높은 작위라고 생각한다”는 요지의 말을 썼다.

동란 시대보리스 차르가 죽고 폴란드군이 모스크바를 점령, 1610년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자기 아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가 차르로 선출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것은 지그문트 3세가 러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러시아인들을 모두 천주교로 개종시키려 한 대계획의 일부였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젊은 브와디스와프 4세는 모스크바 및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서방에서는 이 때까지도 "차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제대로 결론을 내지 못했다. 1670년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알렉세이를 "차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표시했는데, 이유인즉 그 어휘가 "야만족스럽고" 의미상 "황제"를 참칭하기 때문이었다. 교황 같은 서방인들에게 기독교 세계에 황제는 하나 뿐이고, 그 황제가 모스크바에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 문제를 검토한 수도원장 스카를라티는 차르라는 말은 번역이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교황이 그 말을 사용한다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바티칸 주재 러시아 특사 폴 메네시우스(스코틀랜드인으로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에게 고용된 용병대장이었음)도 "샤"나 "술탄"을 라틴어로 번역할 수 없듯이 "차르"에 해당하는 라틴어 표현은 없다고 스카를라티의 의견을 뒷받침했다. 이런 번역상의 난맥을 해결하고, 동로마 제국 계승의 야심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표트르 1세러시아 차르국러시아 제국으로 출범시키고 군주 칭호 역시 "차르" 대신 라틴어 어원의 "임페라토르"로 교체했다. 다만 "임페라토르"를 칭한 루스계 지도자는 표트르가 최초는 아닌데, 다름아닌 가짜 드미트리 1세가 1605년 7월 7일 대관식 이후 임페라토르를 칭했다. 표트르는 1696년까지 "임페라토르"를 비공식적으로 사용하다가, 보야르 두마통치원로원으로 대체하고 신성로마제국 식으로 원로원 수상과 부수상을 두는 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임페라토르 칭호를 공식화한다. 하지만 "차르" 칭호는 그 뒤로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에 흡수된 국가들(타타르 칸국이나 조지아 정교왕국 등)에 대해서 러시아 황제는 그 국가의 "차르"임을 공식적으로 칭했다. 즉 18세기가 되면 "차르" 칭호는 "황제" 칭호보다 열등한 것으로, 또는 "황제"의 동양적 특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여겨졌다. 1783년 크림 반도를 합병한 예카테리나 2세는 "크림의 여차르(Tsaritsa)" 대신 그리스화된 "케르소네소스 타우리카의 여차르"를 칭했다.

1815년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 영토의 대부분이 러시아로 넘어왔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왕 크롤(Król)과 동급의 작위로서 "차르"를 사용하여,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폴란드 입헌왕국의 군주로서 러시아 황제는 "폴란드 차르"를 칭했고, 폴란드 입헌왕국의 현지 명칭은 폴란드어로는 폴란드 크롤국(Królestwo Polskie), 러시아어로는 "폴란드 차르국(Царство Польское)"이었다. 이쯤 되면 "차르"가 황제급이 아닌 왕작급 작위로 격하되었음이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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