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르 이반4세, 정복사업과 외교정책 :: 역사의 하루

 

차르 이반4세, 정복사업과 외교정책

 

친정과 차르 즉위

 

1547에 친정(親政)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차르(왕)를 칭하고, 이후 러시아 왕의 공칭(公稱)이 되었다. 이후부터의 모스크바 대공국을 '모스크바 러시아'(Tsardom of Russia)라고 부른다. 이반은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써 가진 대관식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모델로 하여 거행했다. 그는 일군의 보야르 및 드보랸, 청년 지식인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그는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했다. 1550년대 이반은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이러한 개혁은 틀림없이 항구적인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강국화 정책이었다. 그러나 친정 초기 모스크바 시내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노브고로트와 프스코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반은 즉위 초, 소수의 측근들을 시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 중에서도 심했던 인사들을 잡아 부패, 뇌물, 탐학 혐의로 처형했다. 이어 안드레이 쿠르프스키(Andrey Kurbsky), 시종관 알렉세이 아다셰프, 사제 실베스트르, 대주교 마카리우스 등의 측근들을 발탁, 두마에 저항했다. 동시에 이반은 자신의 왕권이 불안하다고 느낀 나머지 유력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되는 자신의 가까운 친척들을 체포, 참살하거나 독약을 내려 처형해버린다.

1548년 아나스타샤와 결혼했다. 이반은 아내를 사랑하여 아나스타샤 왕비의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혼 한 달 뒤 이반의 궁궐은 다시 창녀들로 채워졌고 또한 시녀들을 비난하거나 욕설을 하였다. 아나스타샤 왕비는 13년 동안 이반 4세의 아내로서 왕비의 자리를 지키다 30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내가 죽자 이반은 왕비가 귀족들에게 독살되었다면서 더욱 포악해져 귀족들을 탄압했다. 1552년 10월 그는 첫 아들인 드미트리를 보았다.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소동의 원인이 된 드미트리와는 동명이인으로, 이 드미트리는 생후 1년만에 요절한다. 후에 그는 일곱째 왕비 마리아 하세에게서 얻은 아들에게도 똑같이 드미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 드미트리가 후대의 가짜 드미트리 소동과 관련이 있다. 1553년 그는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는데 일설에는 뇌염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매독이라고도 한다. 그는 불안해하며 귀족들을 소집 자신의 아들 디미트리에게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병세에서 회복된다. 그러나 이반이 병중에 있을 당시 이반의 측근인 아다셰프, 실베스트르 등은 이반의 아들 드미트리가 너무 어리다 하여, 이반의 사촌 형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를 계승자로 내정하고 있었다. 이반의 집권 초기의 혹독함에 염증을 느꼈던 아다셰프와 실베스트르는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이반의 지지세력인 드보랸과 중소 상인, 지식인들의 반발이 만만찮았으므로 이반이 죽고 난 뒤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반은 쾌차했고, 자신이 믿던 측근들이 자신을 배반함을 알고는 분개했다. 하지만 1553년 6월 26일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집권 초기

 

1547년 의회 제도를 도입한다. 곧 투표가 실시되고, 의회 의원들은 시민 대표자라는 자격으로 국정에 참여하거나 잘잘못을 비평할 수 있었다. 이반 4세가 의회를 도입한 것은 보야르와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553년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왕궁에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동시에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러시아에 소개되었다. 이후 이반 4세는 인쇄기를 러시아 각처에 보급하여 1550년대와 1560년대에는 성서러시아 정교회의 교리서적 및 주변국의 종교 관련 서적, 전설 민담 등을 채록한 서적들이 대량으로 발간되어 보급되었다. 또한 이반은 문맹 퇴치를 목적으로 각처에 학자를 파견하여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인쇄소 건립 초기, 새로운 인쇄기술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인쇄소를 공격하다가 적발됐다. 이들 중 일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도주했지만 일부는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558년 이반의 측근들은 그에게 동부 지역으로 뻗어나가야 된다며 동부 지역의 재건을 주문했지만 이반은 서부의 영토 공략을 원했다. 결국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해부터 발트 해 연안의 리보니아를 공격하여 리보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데 스웨덴,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개입하여 러시아에 저항했다. 전쟁은 시간만 질질 끌고 얻는 것 없이 막대한 병력손실, 전사자만 내고 종결되었다. 동시에 크림 한국의 군사가 모스크바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감행했고, 동부 지역에도 타타르 족이 쳐들어와 약탈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1560년까지 흉년이 계속되었으며, 전염병까지 확산되었다. 러시아의 군사적 관심이 리보니아에 집중하는 때를 이용해 크림의 지배자 데보레트 기레이는 12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여러 번 모스크바를 공격했고, 1572년 모로디 전투에서 멈출 때까지 러시아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수십 년에 걸쳐 남부 국경지대는 노가이 오르다크림 한국의 약탈을 받아 지역주민들이 연행되어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대 녹채 지대의 관리 및 경비에는 연간 수만 명의 병사의 배치를 필요로 해 그 부담은 러시아를 소모시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저해했다.

 

정복 사업

 

그는 이반 3세가 어느 정도 국가적 통일을 이룩한 러시아에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확립하기 위해 1565년1572년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실시하고 대귀족을 탄압하여 사족(士族)적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했다. 대귀족 탄압의 공포정치를 행해서 뇌제(雷帝)라는 이름을 얻었다. 밖으로는 사족(士族)에 토지를 주고, 또 서유럽과의 무역을 희망하는 상인층의 이익을 위해 1552년 카잔 한국, 1556년 아스트라한 한국을 점령 합병하고, 볼가 강의 지배권을 차지하여 동방 및 동남방 진출의 거점을 획득, 1581년에는 카자흐족의 추장 예르마크에 의해서 시베리아 진출도 시도되었다. 나아가서 실패로 끝났다고는 하나 리보니아 전쟁(1558 ~ 1583)에서 폴란드스웨덴과 싸운 것은 서유럽과의 통상을 위해서 발트 해의 진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또한 1550년, 1566년의 두 번에 걸쳐 전국회의를 열어 황제의 뜻을 전국에 철저화시키는 기관으로 삼았다. 또 1553년 처음으로 영국백해(白海)를 통한 통상관계를 가졌으며, 시베리아 정복도 이때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나라, 지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면서 러시아는 1900년대 이후와 같은 다민족, 다종교의 국가로 변모했다. 차르는 지금의 볼가 강 유역 전역에 지배를 미치고 중앙아시아로의 발판을 얻었다.

북서부의 발트 해 해역으로 확장은 매우 곤란한 길이었다. 1558년 리보니아로 공격해 들어간 이반은 그 후 25년의 세월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스웨덴덴마크와의 전쟁에 허비하게 되었다. 일시적인 우세도 보람없이 이반의 군세는 되밀려 러시아는 발트 해에서 패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1560년 아내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사망했다. 이반은 애써 태연한 척, 아무일도 없었던 척 하며 정무를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오프리치리나 측근들에게 조용히 사악한 간신들이 아내를 죽였노라며 분개했다. 이후 이반은 자제심을 잃어갔고, 반대 귀족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또한 이반의 여러번의 재혼을 못마땅히 여긴 동방 정교회를 비롯한 종교들에 대해서도 세금 부과와 혹형을 가한다. 이반 4세는 아내가 독살당했다고 믿고 있었고, 이는 아나스타샤 독살설로 퍼져나갔다. 그 후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에 아나스타샤의 관곽을 발굴한 결과 평균치 이상의 수은비소량이 검출되기는 했다. 왕후 아나스타샤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다시 일부 보야르에게 왕비 독살죄를 물어 대대적으로 처형, 유폐시켰다. 1563년에는 자신의 최측근인 아다셰프와 실베스르트 주교, 그리고 한때 그들의 추대를 받았던 이복 형 블라디미르 및 그의 가족, 친척, 처족들을 모두 처형하고, 사촌 블라디미르 스타리스키까지 참수형에 처했다. 동시에 보야르들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밉보였던 인물들을 처형하다가 나중에는 보야르와 드보랸, 학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처형했다. 또한 자신의 가족, 친지들 중 왕실에 비판적인 자들을 밀고하게 하고, 밀고자에게는 상금을 후하게 내렸다. 리보니아 전쟁의 후유증과 기근 때문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처형은 계속되었다.

 

외교 정책

 

정복 전쟁을 하는 한편으로 그는 영국,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과의 교역, 수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독일의 지기문트 폰 헬벨슈타인 남작이 모스크바의 제사에 관한 기록을 1549년 출판할 때까지 서구인에 있어 러시아는 매우 수수께끼가 많은 사회였다. 이 책에서는 좀처럼 방문하지 않고 부족한 보고서도 없던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과 이해를 갖게 하였다. 1630년대 러시아를 방문한 아담 올레아리우스는 이 나라에 관련한 풍부한 정보를 생생한 모습으로 기술하여 전했고, 그의 책은 순식간에 유럽 여러가지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외교정책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정보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상인들에 의해 전해지게 되었다. 그들중 한명인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북동항로를 항해해 백해에 도착해 모스크바에 상륙했다.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간 후 세바스찬 카포트, 휴 윌로비 경 및 수명의 런던 상인들과 함께 모스크바 회사를 설립했다. 이반 4세는 그들 상인을 엘리자베스 1세와 왕복 서신을 교환하는 데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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