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4세, 러시아 최초의 법전 편찬 :: 역사의 하루

 

 

이반4세, 러시아 최초의 법전 편찬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1530년 8월 25일 모스크바 ~ 1584년 3월 28일 모스크바)는 1533년부터 1547년까지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었으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사용한 첫 번째 러시아 통치자였다. 1533년 3살에 즉위하여 어머니 옐레나 글린스카야섭정을 하였으나, 모후가 독살된 뒤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성직자 막심 트리볼리스(Максим Грек)가 섭정을 했고 1547년 17세부터 친정(직접 정치)을 했다.

이반 4세는 이반 그로즈니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잔혹한 이반"(혹은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이라는 뜻이다. 일본과 대한민국에서는 '그로즈니'를 '뇌제(雷帝)'로 의역해 흔히 이반 뇌제라고 부른다. 이반 3세의 손자이자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재위기간 중 세금 감면 정책 및 중앙집권화 정책을 펼쳤고, 아스트라한 한국, 카잔 칸국, 시베리아를 병합했다. 이반 4세가 죽기 전 러시아동부 유럽에서 오호츠크 해 연안까지 4,046,856km의 영토를 차지했다. 그는 왕비 아나스타샤 로마노프가 죽자, 귀족 보야르들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믿고 난폭한 인물로 변해갔다. 본래 유능한 황제였으나, 신경질이 심하고 편집증적이었으며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잔인한 사람이었다.

노년에는 반쯤 미쳐 며느리 엘레나를 유산하게 하고 아들 바실리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말았다.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했으며, 영국과 통상·외교 관계를 열었다. 1588년 발트 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실패했으나, 1582년, 시베리아를 정복해 동방에의 길을 열었다.

 

출생과 생애 초년

 

그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첫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다. 적장자를 원했던 아버지 바실리 3세는 늦은 나이에 아들 이반을 보았다. 그러나 바실리 3세는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대공이 되어 주로 어머니가 섭정했다. 이반의 어머니였던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5년간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는데,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결국 어머니 역시 독살당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독살당하자 이반을 돌보던 유모까지 수도원에 감금되고 졸지에 고아가 된 이반왕에겐 유리(Yuri)라는 어린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은 듣지 못하는 농아였다. 그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명 더 있었다.

아버지 바실리 3세의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왕비자리에서 폐출되었다. 아버지 바실리 3세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고, 적장자를 얻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바실리 3세의 후처였던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이반 4세와 농아 유리, 그리고 딸 한명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첫 아들이던 이반이 3세 되던 해 바실리 3세가 세상을 떴고, 그는 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이후 모후인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섭정을 맡았지만 엘레나는 그가 8살 되던 해에 독살당했다. 중앙 귀족인 보야르와 그들의 협의회인 두마 의회에서는 솔로모니야 사부로바 폐위에 반발했는데, 솔로모니야는 보야르 중에서도 유력 가문 출신의 딸이었다. 그리고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신자인 점도 보야르들의 심기를 거슬렀다. 이후 보야르 및 그들의 협의회인 두마 의회에서는 이반에게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하게 된다.

 

즉위

 

 

아버지 바실리는 어린 아들의 즉위를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고, 안드레이 슈이스키 등 일부 보야르를 포섭하여 차르직에 앉으려 했다가 사전에 발각, 모후 엘레나는 유리 이바노비치를 투옥시킨다. 그리고 1536년 엘레나 글린스카야유리 이바노비치를 제거했다. 또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그의 자리를 노렸다. 엘레나는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고,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해 11월에 사망한다. 어머니 엘레나 글렌스키야는 미남 귀족 오블렌스키 공작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엘레나는 이를 못마땅히 여긴 자신의 친삼촌, 이반의 외종조부인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려 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스키 가문, 비엘스키 가문 등 유력 귀족들의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의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을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진다. 그러나 1538년 어머니 엘레나가 의문의 독살을 당한다. 때마침 바실리 3세에게 앙심을 품었던 리투아니아는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계속 침략해왔다. 겨우 막아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엘레나는 리투아니아와 1535년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반은 세살의 나이에 차르로 즉위했고 8살 때 모후마저 사망하자 실권자인 슈이스키 가문과 비엘스키 가문이 정권을 장악했고, 귀족회의인 보야르가 대신 정치를 주관했다. 그러나 슈이스키 가문의 당주 바실리 슈이스키는 오블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처형하는데, 이때 경쟁자 가문인 비엘스키 가문의 이반 비엘스키를 숙청,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년 후 이반 비엘스키를 풀어주었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죽인다. 동시에 이반 비엘스키와 가까웠던 모스크바 총대주교 이오아사프도 축출해버린다.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고통스러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이반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살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비엘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당했고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귀족들의 섭정 기간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이름뿐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농아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도록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짜리 어린 황제 형제를 심문한 뒤 밀실로 끌고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오로지 왕실행사가 있는 날로, 이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깨끗하게 씻겨진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왕실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를 여과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비뚤어지고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고 정무는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및 베리스키 가문 등 유력 보야르가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다툼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 차르가 될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중 슈이스키 가문은 류리크의 먼 후손으로 왕실의 먼 친척이며 동시에 선대 왕인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왕비 에우독시아 드미트리예비나를 배출한 가문이며, 니즈니노브고로드로스토프의 대공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Dmitry Konstantinovich)의 아들 바실리 키드예파(Vasiliy Kirdyapa)를 시조로 한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였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아예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두고 강제로 신게 했다.

어린 시절 이반은 높은 성 꼭대기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지방의 귀족인 드보랸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다. 그러나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몇몇 보야르드보랸 자제들을 동원, 두마 회의때 크레믈린 궁의 주변에 매복시켰다. 회의가 끝나자, 이반은 이들을 시켜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인 보야르 귀족의 유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보내 맹견에게 물어뜯겨 죽게 했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고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측근들을 매복시켰다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잡아다 개 사육사에게 넘긴다. 이후로 이반에 대한 보야르, 두마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거리를 나눠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어뜯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 일로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에게 친정을 청했다. 그러나 친정을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 가문 사람들을 중용한다. 그러나 1546년 그는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해버리고 만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절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천차만별인 상법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다.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6년 12월 이반은 내년에는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Anastasia Romanovna)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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