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이반 4세, 중앙 귀족 숙청 :: 역사의 하루

 

폭군 이반 4세, 중앙 귀족 숙청

 

중앙 귀족 숙청

 

이반 4세는 왕후 아나스타샤의 죽음을 계기로 보야르들에 대한 처형을 계속 단행했다. 그러자 보야르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고, 왕실의 먼 친척을 대안자로 삼거나 왕실 자체를 폐출시키려 했다. 1564년 이반은 최측근 몇명을 대동하고 모스크바를 떠나 알렉산드로프스키 성에 장기간 은거했다. 그는 일부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들이 자신의 어린시절만을 생각하며 무시, 계속 정권을 위협하여 더 이상 정치를 하기 힘들다는 내용의 편지 서신을 써서 두마, 보야르, 드보랸 및 전국 각지로 보냈다. 또한 성직자들과 일반 백성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의 편지를 받은 지역의 드보랸 및 상인,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폐단이 보야르 및 일부 두마 의원들이 국정을 농단한 것으로 해석하고, 반발 여론이 나타났다.

두마의 지도자인 보야르는 이반에게 다시는 차르 폐하에게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폐하에게 무례한 자는 스스로 자정해서 처벌할 것이니 부디 돌아와 달라며 간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반은 바로 돌아와 부패관료와 반역자에 대해서는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하는 것과 그 재산을 몰수할 권한을 갖는다고 선포했다. 동시에 오프리치니나라는 특별 행정구역 및 황제의 직할지역 건설에 착수한다. 1565년 차르는 국가를 그의 사적 영지 오프리치니나와 공적 국토 젬시치니나의 2개로 분할했다. 이반은 자신의 직속령에 러시아에서 가장 풍부한 지역을 편입시켰다. 이반의 분노는 보야르, 상인, 더 나아가 평민에까지 향해져 어떤 자는 그 장소에서 처형되었고, 어떤 자는 토지 및 재산을 몰수당했다. 러시아에서 공포에 뒤덮어진 10년의 기간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노브고로드 대학살(1570년)에서 정점에 달했다.

한편 이반의 즉위 초기 그를 지지했던 안드레이 쿠르프스키 1565년 러시아를 떠나 외국으로 잠적했다. 그는 이반의 공포정치를 경계하며 그에게 충고의 편지를 보냈는데 "차르는 민중의 지도자이자 목자로서 귀족과 지식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만인의 아버지가 되어 민중의 생활을 보호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이반은 "러시아의 차르는 신께서 권리를 부여한 전제군주이므로 누구의 비판도 받아서는 안된다. 차르는 신이 내려주신 노예들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 차르가 설령 불완전하여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은 후대의 역사가 평가할 일이지, 노예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신하된 자로서 차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역이며 동시에 신의 뜻을 거스른 행위이므로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짓이다. 모든 백성은 군주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지엄하신 신의 명령이다."라고 답하였다. 1566년 이반은 차르의 근위대 겸 오브리치니나의 치안을 담당하는 오프리치니나 부대를 창설한다. 이들은 검은 제복을 착용하고 다녔으므로 흑위병, 검은 기사로 불렸다.

 

오프리치니나와 대학살극

 

오프리치니나에서의 정책으로 인해 이반은 각 지역에서 지도적인 지위에 있던 보야르 가문이 갖고 있던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을 파괴했으나, 그들은 러시아의 강국화를 유지하고, 가장 우수한 국가의 관리, 운영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무역은 쇠퇴하고 농민들은 나날이 오르는 세금과 폭력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에서 도망치려고 하였다. 농민들을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마련해 그들을 붙잡아 두게 되면서 러시아의 농촌사회는 법제화된 농노제에 가깝게 되었다. 1572년 이반은 마침내 오프리치니나 체제를 포기했다. 통설에 의하면 오프리치니나 체제는 전쟁의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과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이반의 국외, 국내 정책은 러시아를 황폐화시켜 동란 시대(러시아어: Smutnoye vremya, 1598-1613)라고 부르는 사회분쟁과 내전을 일으키게 만들고 말았다.

이때 블라디미르 스타리츠키 일족의 처형과 고문을 담당했던 심문관 중 한 사람인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오프리치니나 부대의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 기용되었는데, 그는 보야르 및 왕족, 두마 의원 및 반대파는 물론이고 드보랸, 지식인, 평민 등 가리지 않고 잡아다가 끓는 물에 담거나, 살점을 베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오프리치니나 부대원들은 사형 때도 사형수들을 끓는 물에 넣거나 긴 쇠꼬챙이로 꿰거나 기둥에 묶은 뒤 불에 고기 굽듯이 천천히 돌려가면서 구워 죽였다. 1570년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부대에게 명령하여, 자신에게 가장 적대적이던 도시인 노브고로트 시민들을 전부 사형에 처했다. 그는 노브고로트 시민이 외부의 적과 내통한다며 오프리치니나 부대에게 노브고로트 지역 주민들을 벌하라고 지시했다. 모스크바 지역에 안좋은 감정을 가졌고 이반 4세에게도 악감정을 가진 보야르 들이 많이 살던 노브고로트에 불시에 습격, 1500여 명의 보야르와 그 가족들이 한꺼번에 처형당했다. 1570년 노브고로트 시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은 이반의 명령을 받은 오프리치니나 부대원들의 주도하에 벌어졌다. 한편 이반 4세는 자신의 반대 세력이 노브고로트에 많이 모여 살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일주일 동안 무려 시민 6만명을 온갖 방법으로 처형했다.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이거나, 펄펄끓는 물에 사람을 던져서 죽이거나, 기름을 넣은 큰 가마솥에 사람을 튀겨 죽이기도 했다. 그는 블라드 체페슈의 고문, 형벌 자료를 직접 참고, 연구했고, 이러한 처형 방법은 이반이 구체적으로 지시하기도 했다. 검은 옷 에 검은 말을 탄 황제의 오프리치니나 비밀경찰대가 나타나는 거리마다 남녀노소의 비명과 공포감, 적막감이 감돌았다.

1575년 이반 4세는 갑자기 타타르족시메온 벡불라토비치에게 차르직을 일시 양위하고, 자신은 대공이라 칭했다. 시메온 벡불라토비치는 정교회로 개종한 타타르족이지만 이반 3세의 고손녀 마리아 므스티슬라브스카야와 결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메온의 거듭된 복직 요청 덕에 이반은 1년만에 다시 차르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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