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토쿠 태자, 일본에 불교 보급 :: 역사의 하루

 

쇼토쿠 태자, 일본에 불교 보급

 

쇼토쿠 태자 (일본어: 聖徳太子, 574년 2월 7일 ~ 622년 4월 8일(일본서기 - 621년 2월 5일설 있음))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황족이자 정치가였던 우마야도 황자(厩戸皇子) 또는 우마야도 왕(厩戸王)에 대한 후세의 호칭이다. 요메이 천황의 장남이고 어머니는 긴메이 천황의 황녀 아나호베노하시히토 황녀(穴穂部間人皇女)이다. 아스카 문화의 중심 인물로서 스이코 천황의 치세에서 섭정(攝政)을 맡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협력하여 정치를 행했다. 당시의 국제적인 긴장 속에서 수나라에 사자를 파견하는 등(견수사)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수입하고 12계(十二階)의 관위17개조 헌법을 제정하는 등 일본 정치체제를 확립한 인물이었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일본에 불교를 보급시켜 융성시킨 인물이었다.

 

비다쓰 천황 3년(574년), 다치바나노도요히 황자(橘豊日皇子)와 아나호베노 하시히토 황녀(穴穂部間人皇女) 사이에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긴메이 천황을 아버지로 하는 이복 남매로, 다치바나노도요히 황자는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의 딸인 기타시히메(堅塩媛) 소생이었고, 아나호베노 하시히토 황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이나메의 딸인 오아네노기미(小姉君)였다. 즉 우마야도 왕자는 소가 씨(蘇我氏)와는 깊은 혈연관계가 있는 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처를 존경했다고 하며, 그와 관련해 여러 가지 일화와 전설을 남겼다.

비다쓰 천황의 죽음(585년)으로 왕자의 아버지 요메이 천황이 즉위할 무렵, 일본은 불교 수용을 놓고 숭불파(崇仏派)인 소가노 우마코와 배불파(排仏派)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요메이 천황은 즉위한 지 2년만에 죽고(587년), 황위를 놓고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소가노 우마코는 비다쓰 천황의 비였던 도요미케카시키야히메(豊御食炊屋姬)의 조를 얻어내어 모리야가 지원하고 있던 아나호베 황자(穴穂部皇子)를 주살하고 여러 호족과 황자들을 모아 모리야를 토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일으킨다. 왕자는 소가 씨의 편에 서서 모노노베 씨와 싸웠다. 함께 가와치 국 시부카와 군(渋川郡)의 모리야 저택을 공격했으나, 군사 씨족이었던 모노노베 씨의 정예 군사를 상대로 고전을 치르며 세 번이나 패했다. 이를 지켜본 왕자는 백교목(白膠木)을 깎아 사천왕의 모습을 만들고 전승을 기원하면서 승리한 뒤에는 반드시 불탑(佛塔)을 지어서 불법을 널리 퍼뜨리겠다고 맹세했다. 소가씨 군대의 대립 속에서 모리야는 도미노 이치이(迹見赤檮)가 쏜 화살에 맞아 죽고 그의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져, 대호족 모노노베 씨는 마침내 몰락했다. 전쟁이 끝난 뒤 우마코는 하쓰세베 황자(泊瀬部皇子)를 왕위에 앉혔다(스슌 천황). 그러나 정치 실권을 가진 우마코에 불만을 품은 스슌 천황은 마침내 우마코와 대립하게 되었고, 스슌 천황 5년(592년), 우마코는 야마도노아야 고마(東漢駒)를 시켜 스슌 천황을 암살해버리고 도요미케카시키야히메를 옹립한다(스이코 천황).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제로서 즉위한 스이코 천황은 자신의 아들(즉 비다쓰 천황의 왕자)을 태자로 세우지 않고, 대신 우마야도 왕자를 황태자로서 스이코 천황 원년(593년) 4월 10일부터 섭정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태자 책봉은, 스이코 천황을 자리에 앉힌 소가노 우마코가 주체라는 의견도 있다. 이 해에 우마야도 왕자는 모노노베 씨와의 전투 때에 했던 맹세에 따라 셋쓰 국나니와(難波, 오늘날의 오사카)에 시텐노지(四天王寺)라는 사찰을 세우게 하였는데, 쇼토쿠란 시호도 607년, 야마토 지방에 스이코 천황과 공동으로 설립한 호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이코 천황 2년(594년), 왕자는 불교 융성의 조를 발표했다. 스이코 천황 3년(595년)에는 고구려의 승려인 혜자(慧慈)와 백제의 승려인 혜총(慧總) 등이 건너왔다. 특히 혜자는 왕자에게 "수나라는 관제가 정비된 강대한 나라로 불법을 독실하게 보호하고 있다"고 전하는 한편 왕자에게 《법화경》을 진상하고 강독하였다. 이렇게 혜자의 교화로 불교에 입문하여 혜자를 스승으로 삼아 5계를 받고 웅응정사(熊凝精舍)를 짓고, 불교를 널리 보급하였다. 또 고구려의 기술자들을 초청하여 스이코 천황 6년(598년)에 호류사를 건립하였다. 스이코 천황 8년(600년),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병시키고 신라로부터 조를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한국측 자료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스이코 천황 9년(601년),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를 지었다. 스이코 천황 10년(602년), 다시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친동생 구메 황자(来目皇子)를 장군으로 하는 2만 5천의 군사를 지쿠시(筑紫)에 모았지만,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왕자가 죽었고(신라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후임으로 임명된 이복동생 다이마 황자(当麻皇子)는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수도로 돌아와 버려 결국 원정은 중지된다. 이러한 신라 원정 계획은 천황의 군사력 강화에 목적이 있었지 원정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는 유학에 영감을 얻어 스이코 천황 11년(603년) 12월 5일, 소위 '관위(冠位) 12계(階)'라 불리는 관위제를 제정한다. 성씨제(氏姓制)와는 달리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천황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스이코 천황 12년(604년) 4월 3일, 「여름 4월 병인 초하루 무진에 황태자가 친히 처음으로 헌법 17조를 짓다(夏四月 丙寅朔戊辰 皇太子親肇作憲法十七條)」(《일본서기》). 17개조 헌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일본 최초의 법으로, 호족들에게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천황을 받들어 불법을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스이코 천황 13년(605년), 왕자는 이카루가노미야로 옮겨 거주하였다. 수나라의 양제가 보낸 국서에 답하여, 스이코 천황 15년(607년),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 구라쓰쿠리노 후쿠리(鞍作福利)를 사자로 하여 수나라에 국서를 보냈다. 이듬해 수나라의 답사(答使)로서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裴世淸)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배세청이 가지고 간 글에는 "황제는 왜황에게 묻는다(皇帝問倭皇)"고 적었고, 이에 대한 답장으로 "동쪽의 천황은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고한다(東天皇敬白西皇帝)"고 하는 등, 수나라가 '왜황(倭皇)'이라고 적은 부분을 '천황'으로 고치고 있다(《수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내니 별일 없는가?"라는 표현이 답서에 실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그 자신도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왕자는 스이코 천황에게 《승만경》을 강의하고, 스이코 천황 23년(615년)까지 《법화경》과 《유마경》 등의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저술하였다.

스이코 천황 28년(620년), 우마야도 왕자는 우마코와 의논하여 《고쿠기(國記》, 《천황기(天皇記)》 등의 사서를 편찬하였다. 스이코 천황 30년(622년), 이카루가노미야에서 쓰러진 우마야도 왕자의 회복을 빌던 왕자비 가시하데노 오오이라쓰메(膳大娘女)가 2월 21일에 죽고, 그 뒤를 따르듯 다음날인 22일에 우마야도 왕자도 죽었다.(《일본서기》는, 동 29년 2월 5일, 서기 621년의 일이라 했음) 사후 생전에 왕자가 짓게 한 웅응정사에 큰 절을 지어 태자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최근의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는, 일본서기 등의 쇼토쿠 태자상을 허구로 하는 설(說)을 외치는 연구자도 있다. 호류사에 전해 오던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는 백제 아좌 태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졌으며 현재는 일본 제실 박물관에 전하고 있다.

 

묘소

 

쇼토쿠 태자의 묘소는 지금의 일본 오사카부 미나미가와치 군(南河内郡) 다이시마치(太子町)에 있는 에이후쿠지(叡福寺)의 「에이후쿠지 기타 고분(叡福寺北古墳)」이 궁내청에 의해 쇼토쿠 태자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쇼토쿠 태자의 어묘御廟 ・ 시나가류磯長陵). 《일본서기》에는 시나가류(磯長陵)로 되어 있으나 시나가묘(磯長墓)로도 불린다. 아나호베노하시히토 황녀와 가시와데노 호키기미노 이라쓰메(膳部菩岐々美郎女)를 합장한 삼골일묘(三骨一廟). 이들을 후세에 비정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직경 약 55m의 원형 고분이다. 봉분의 주위는 「결계석(結界石)」이라 불리는 돌들이 이중으로 둘러쳐져 있다. 2002년에 결계석 보존을 위해서 궁내청 서릉부(書陵部)에 의해 정비되는 와중에 봉분의 흔적이 세 곳이 발굴되었다. 2002년 11월 14일, 일본 고고학과 역사학 학회 대표 외에 조사 상황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는데, 봉분 직경이 55미터를 밑돌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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